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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필리핀

출 보라카이, 마닐라 방황하기

by 개굴아빠 2012. 12. 18.
(02년 aqua사이트에 올렸던 필리핀 보라카이 자유 여행기를 옮긴 것입니다.)

엑소더스(다른 말로 출 보라카이기) 

"엄마, 내일 마닐라 가는 거예요?" 

"응." 

"가기 싫은데... 힝..." 

자기 전 개구리랑 개구리 엄마와의 간단한 대화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카운터에서 10시 30분에 방카가 출발하니 그렇게 알고 체크아웃하란다. 가볍게 아침을 먹고(가볍게 먹지 않을 수가 없다. 음식들이 '땡기질' 않으니 말이다.) 짐 정리를 한 후 체크아웃을 하러 가니 쌀쌀맞은 리나는 없고 다른 아가씨가 정산을 하더니 250페소를 더 달란다. 

"보소 아가씨, 먼 돈을 더 달란 말고?"

"국제선 리컨펌 하는 거 안 있어예, 그거 1인분만 주셨잖아예. 그라고, 세이프티 박스 사용료 50페소 하고예." 

"그라모 리컨펌 100페소라는 기 두당이란 말잉교?"

"하모예."

"미치건네. 아, 그라고 세이프티 박스 사용료는 와 또 달라카는교? 그날 줬단 말이라." 

"그라모, 200페소만 더 주이소." 

웃기는 사람들이다. 리컨펌 할 때 100페소 줄 땐 아뭇소리 않더니 나갈 때 딴지를 건다. 하기야 영어 짧은 내가 잘못이지. 하지만 분명히 그 땐 "100페소 per person"이라고는 안했었는데. 에그, 내가 잘 못 들었었겠지. 그래, 200페소 더 먹고 부우자 되세여. 

그래도 나갈 때의 서비스는 만족할 만하다. 짐꾼이 짐을 모두 들어주고 방카까지 태워주고 트라이시클까지 거기다가 공항에서 체크인까지 몽땅. 비행기 출발 시간 되면 자기가 알려 줄테니 근처에서 쉬고 오란다. 대략 45분 가량 남았다. 

맞은편의 영빈관(말은 迎賓館이지만 간판의 글자는 '여엉 빈 관'이다. 먼 말인지는 가서 보면 안다.) 에 앉아 식사를 주문했다. 사발면, 잔치국수, 비빔밥. 모두 5,000원에 가까운 가격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1,500원해도 비싸다고 할 음식들이긴 하지만 느끼한 음식들에 질려있던 개구리 엄마와 나는 그런대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거기다, 보라카이의 우동집에서는 단무지 조각 하나 안주지만 여기는 김치에다 멸치 볶음에다 오이 조림까지 준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사장님이 한국사람이란다. 그렇지, 아무래도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섬나라 국민의 쪼잔함과 같을까. 페소가 모자라 달러로 계산하고 거스럼돈을 페소로 받았다. 덕분에 더 이상 환전할 필요가 없었다. 

대기실로 들어갈때까지도 레드코코넛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잘 가라고 하면서 정겨운 미소로 손을 흔들어 준다. 카운터 직원만 덜 사무적이라면 레드코코넛도 꽤 괜찮은 곳인데. 


아시안스피릿 안에서 

나가는 비행기는 좌석이 꽉 찼다. 할 수없이 개구리랑 개구리 엄마랑 한 자리에 앉고 나는 한국사람 비스므리하게 보이는 필리피노와 함께 앉았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동안 비디오 카메라로 찍고 있으려니 옆에서 성경을 읽고 있던 필리피노가 한국 사람이냐고 묻더니 자기도 서울에 좀 있어 봤다고 한다. 잠시 성경을 더듬어 읽더니 이번에는 비디오 카메라가 디지털인지 물어 본다. 개구리 태어나면서 산 거니 디지털일 리가 없지. 아니라 그러니까 그냥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인사 치레로 성경책 아니냐고 물어 보니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당연히 가톨릭 신자려니 싶어 물어 보니 아니란다. 개신교 신자란다. 이게 내가 완전 실수(?)한 것이었다. 이 양반 내게 크리스챤이냐고 묻길래, "아니다, 가톨릭 신자이긴 하지만 어머니 따라 절에도 가고 하는 사이비."라고 했더니 자기도 처음에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개종을 했다면서 급기야는 교리에 대해 얘기를 시작한다. 허거거거걱. 비행기 소리는 엄청 시끄럽고 말은 빠르고.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른 체 하고 창밖이나 볼까? 난 기초 생활 영어도 버벅거리는 수준이잖아. 하지만, 자꾸 말을 걸어온다. 예수의 죽음이 어떻고 사후 영혼의 존재가 어떻고 열두 제자가 어떻고. 아아아 나더러 저런 말을 어떻게 알아들으라고.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불쌍한 일반 한국인의 표본을 내가 또 보여야 하다니.

가만 있자, 사후 영혼? 열두 제자? 허거거거걱! 내가 알아듣고 있잖아. 이럴 수가! 신기하게도 이 양반의 말을 거의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겨우 나흘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귀가 트여가고 있었나 보다. 영어 잘 하시는 분들이 보시면 웃으시겠지만 아시안스피릿에서의 40분 가량의 대화는 내게는 정말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일반 생활 영어도 아닌 종교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 물론 그래 봐야 생활 영어에서 단어 몇 개 더 추가된 것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30분 가량은 불교까지 끌어들이면서 토론(? 주로 내가 질문하고 그 양반이 설명하는 형태.)을 하고 나머지는 서울에서 포장마차 얘기, 막걸리 얘기라든지를 하다보니 어느새 스피커에서는 5분 후에 마닐라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메시지가 나오고 있었다. 


마닐라의 거리를 방황하다 

필리피노와 가볍게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쿠폰 택시 삐끼가 어디 갈 거냐고 묻는다. 이번에는 단호히 "노 땡큐."라고 하고 살펴보니 바로 길 건너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고 택시인 듯 싶은 차들이 계속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택시를 타고나서 "메뜨로 딸랑."이라고 말할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이미 미터는 켜져 있었다. 

"다이아몬드 호텔 플리즈" 요금은 쿠폰 택시의 5분의 일에 불과한 76 페소. 85페소를 주고 내렸다. 팁이 9페소면 10%가 넘는데도 기사 표정이 뚱하다. 

좋긴 좋다. 뉴월드하고는 비할 바가 못된다. 하기야, 필리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호텔이라니까. 하지만, 객실은 그 급이 다르지 않은 이상 큰 차이는 없다. 대충 정리하고 2시 반 정도에 방을 나섰다. 프론트로 가서 에스엠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니 나가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다시 첫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쭈욱 가랜다. 그러면 걸어갈 수도 있냐고 물어보니 걸어갈 수도 있단다. 그럼 멀지 않은 모양이구만. 아마 지리를 아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 가족은 마닐라 시내를 맘대로 쏘다닐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지프니도 타 볼 수 있었다. 

시키는 방향으로 걷다보니 차츰 사람들이 많아진다. LRT가 보이는 곳까지 오니 구경 거리도 제법 만만찮다. 야자 열매를 자르고 있는 사람들, 파인애플을 예술적으로 깎아 파는 사람들, 사탕이나 빗을 파는 노점상들, 사설환전소들, 졸리비.. 앗! 졸리비다. 걷느라 다리도 아픈데 쉬어 가야지, 졸리비도 가보고. 

여기서는 "세트 메뉴 몇 번"이라는 식으로 주문을 한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1번일테니 1번과 '할로할로 향이 나는 아이스크림'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시켰다. 물론 할로할로는 아니다. 세트메뉴 1번은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 콜라가 한 세트인데 39.5페소이니 1,000원 가량인 셈이다. 맛도 괜찮았다. 패스트푸드를 그리 즐기지 않는 나로서도 햄버거는 상당히 맛있게 느껴졌다. 

참, 졸리비 들어가기 전에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사실 첨에는 아가씨들의 짙은 쌍꺼풀과 큰 눈이 엄청 매력적으로 보였는데 며칠 지나고 보니 여간 느끼한 게 아니다. 우리 나라 아가씨들의 쌍꺼풀 없는 눈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다고 하는 이 동네 총각들의 심정을 알겠다.)에게 에스엠이 어디냐고 물어 보니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그냥 택시를 타란다. 걸어갈 수 있다던데라고 하니 농담하지 말고 기냥 택시 타란다. 

졸리비를 나오면서 혹시나 싶어 이번에는 경비에게 물어 보니 시청이라고 표시된 지프니를 타랜다. 흠. 잠시 긴장. 어케 하나? 좀 더 긴장. 도로를 보니 지프니들이 지 맘대로 사람들을 태우고 내리고 하고 있다. 시청이라고 표기된 지프니가 제법 보인다. 에라, 모르겠다. 

"개구리 엄마, 개굴아. 빨리 타." 

개구리와 개구리 엄마를 데리고 시청이라고 표시된 지프니를 무작정 탔다. 잠시 두리번두리번. 옛날 시내 버스도 아닌 것이 봉고도 아닌 것이. 먼저 타고 있던 사람들이 엉덩이를 조금씩 움직여 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런데 차비는 얼마지? 언제 줘야 되지? 한참(약 3초?)을 고민하다 옆에 있는 아줌마에게 물어 보니 "두당 4페소여, 지금 줘여." 얼른(사실은 한 구역 쯤 간 후에 줬음. 아마 기사가 좀 황당했을 지도 모름.) 앞 사람에게 주니 그 앞사람은 다시 앞 사람에게 그 사람은 다시 기사에게 돈을 건네 준다. 듣던 대로다. 아줌마에게 다시 에스엠이 어디냐고 물으니 시청 옆에서 내리면 되는데 가르쳐 주겠단다. 

제 경험으로는 여행사나 가이드의 말과는 달리 마닐라 시내를 활보하는 것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밤이 아니라 낮에 말이죠. 


요즘 너무 바빠서 많은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다음 글은 '에스엠'과 '이하우이하우'입니다.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이...... 얼른 써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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